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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책이 비난이 돼서는 안된다




너는 왜 다니는 거야 ? VS 다음엔 만회 하리라 믿어

남을 비난하는 것은 위험한 불꽂이다. 

그 불꽂은 자존심이라는 화약고의 폭발을 유발하기 쉽다.

이 폭발은 가끔 사람의 생명까지 빼앗아 간다. 

                                             - D 카네기- 



결제서류를 들고 성대리는 최 부장의 눈치만 보고 있다. 상반기에 할당된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팀별로 부과된 할당을 성대리 팀만 채우질 못했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회사 상황이기 때문에 상사로부터 질책을 받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최 부장 : 이걸 들고 와서 나보고 결재해 달라고 ?

성 대리 : 죄송합니다. 

최 부장 : 지금 회사 상황이 어떤지 알아 ? 몰라?

성 대리 : ..........

최 부장 : 너는 도데체 여길 왜 다니는 거야 ?


2010년 남아프리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월드컵 도전 역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을 달성 했다. 6월23일 나이지리아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2:2로 비기면서 이루워낸 결과 였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후반 교체 선수로 들어간 진공 청소기 김남일 선수의 수비실수로 패널틱킥을 내 주게 된 것이다.

이길 수 있는 경기를 무승부로 끝내게 되었을때 국민들의 실망감은 대단했다. 

아르헨티나가 그리스를 이겨주어 16강 진출이 무산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경기 종료와 함께 김남일 선수에 대한 비난은 거세졌고불똥은 축구와 무관한 그의 아내에게까지 튀었다. 

두 사람의 미니 홈피에 수 많은 악플들이 달렸고, 부부는 그 순간부터 국민의 역적이 되고 있었다. 

2002년 월트컵 때 빼어난 그의 수비 실력과 카리스마를 국민들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이 행동한 것이다. 


비슷한 일은 6월 18일 아르헨티나 전에서도 일어났다. 

한국의 페널티지역 오른쪽에서 날아온 프리킥이 박주영 선수의 오른쪽 무릎을 맞고 골문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수 많은 비난이 박주영 개인에게 쏟아졌고 비난과 조롱은 그가 믿는 종교로 까지 번졌다. 

그가 한국팀의 골 잡이로서 보여준 수 많은 득점과 환희의 순간들은 자책골 앞에서 무기력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전과자가 또 다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또는 사회적으로 유명한 공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사람들은 그를 향해 비난을 가한다. 

그가 한 행위는 사회적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망각한 지도층들의 파렴치한 행위는 응분의 법적 대가 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비난을 하는 이유에는 세상에 "반면교사"로 삼기 위한 교육적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난은 종종 상대가 저지른 실수나 잘못의 정도를 넘어 서기도 한다. 

마치 비난의 목적이 오로지 조롱과 비아냥에 있는 것처럼 실수와 잘못을 넘어 그 사람의 인간성과 기타 다른면 까지 비난이 이르게 되는 것이다. 


"너는 도데체 회사에 왜 다니는 거야 ?"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한 성 대리를 향해 초 부장이 밀한 문책성 발언 역시 비난에 가깝다. 

그의 말이 순수한 문책이 되기 위해서는 목표에 미달한 결과를 지적하는 것으로만 그쳤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상대가 느끼는 문책의 강도는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최 부장은 덮어놓고 상대방을 궁지로 몰고 말았다. 


이익을 산출하는 것이 회사의 목적이라면 이기는 것은 축구 팀의 목적이다. 

축구에서 일류팀이라 할지라도 늘 이깅 수 없듯이 이익만을 산출하고, 늘 목표치를 초과하는 기업도 있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늘 회사의 개대를 넘어서는 직원도 있을 수가 없다. 

최상의 조합과 전술을 강구하는 것이 유능한 축구감독의 임무인것 처럼 , 회사에 맞는 인재를 뽑고 그 인재를 훈련하고 조직 시키는 것은 기업가의 임무이다. 

만약 그렇게 무능한 직원이 있었다면 애초부터 판단을 잘못한 기업가의 책임이 오히려 크다고 여기는 것이 밎다. 


예와 같은 상황이 일어 났을때 상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문책과 격려이다. 

격려는 상대에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수 있는 용기를 심어주는 언어이다. 


"다음 분기엔 이번 실수까지 만회 하도록 합시다."

"앞으로 더 분발하겠다는 의미로 내가 믿고 있겠어"


이런식의 표현에는 격려의 뉘앙스만 있는것이 아니다. 

'만회'나 '분발'이라는 단어에는 상대가 분명히 잘못을 범했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하지만 대화를 질책으로 마무리 하지 않고 상대의 능력에 대한 기대를 반영함으로써 질책은 강한 격려로 전환된다. 

그런데 만약 최 부장이 보기에 성 대리가 지속적으로 업무 성과가 낮아 심각한 사원이라면 어떨까 ?

그렇다 하더라도 긍적적인 대화가 갖는 효력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시말해 최 부장이 성 대리를 쫓아낼 것이 아니라면, 어떻든 그와 함께 계속 일을 할 것이라면 비난의 뉘앙스만이 가득한 질책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은 바보가 아닌 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 

성 대리의 경우처럼 결과가 분명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런 결과나 잘못에 대해 비난만을 하게 된다면 비난을 받는 사람은 어떻게든 비난을 피하고자 변명하기 쉽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빨리 고치고 만회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닥친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는 임기 응변식 대응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격려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고치려고 애를 쓰게 된다. 


잘못이 분명하게 들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그에 대해 비난하기 보다는 격려를 하게되면 속으로는 더욱 분발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 비난은 실패를 두려워하게 만들지만 격려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베드로는 동이 트고 새벽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하고 만다.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닭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의 예언을 상기한 베드로가 느꼈을 죄책감의 강도를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은 선수의 심경에 비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약 50일 후 보금을 증거하는 믿음의 아들로 다시금 변모하게된다. 

그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기에 이런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

바로 보활한 예수의 행적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예수는 부활한 후 11번 그 모습을 보였는데 베드로에게만 일곱차례 보여 주었다. 

'주님의 아들'을 부인 했다는 자책감에 빠져있던 베드로에게 무엇보다 필요 했던 것은 예수의 위로와 격려였던 것이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가서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준다. 

예수는 베드로를 실의에 빠진 겁많고 나약한 제자로 본 것이 아니라 위대한 주님의 사도로서 거듭날 제자로 본 것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거듭나지 않았다면 성경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잘못을 저질렀거나 업무상의 과실을 저지른 부하 직원을 필요 이상으로 문책 하거나 비난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회사와 사원의 발전을 위해 좋지 않은 일이다. 

의로와 격려만큼 단결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마법은 없다. 

말에 비난의 뉘앙스를 얹기 보다는 격려의 힘을 실어주는 것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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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사람은 뛰어난 배우와 같다





누가 손숙우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세번이나 영윤(재상)이 되어도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더니, 세번이나 벼슬에서 쫓겨나도 걱정하는 빛이 없네요. 

처음에는 감정을 속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봐도 마음이 편안하게 보입니다. , 도데체 어떻게 수양을 하신건가요?"


"무슨 특별한 방법이란게 있겠나, 나는 그저 부귀영화가 오면 오는대로 물리칠 수 없고 , 가면 가는대로 잡을 수 없다고 여길뿐 이라네, 행복이라는게 벼슬자리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게 있는 것인가 ?

그게 벼슬자리에 있는 것이라면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이잖은가,

그게 내게 있는 것이라면 벼슬자리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 아니겠나, 

나는 설렁설렁 다닐 뿐 , 부귀영화에는 관심이 없네."


손숙오는 초나라의 영윤 즉 재상이었는데, 사기 열전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손숙오의 주특기는 임금이 뭣 좀 잘 해보겠다고 , 혹은 한 건 해보겠다고 제도를 바꿔서 혼란을 일으키면 그걸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돈이 너무 무거워서 화폐유통이 안되니까 좀 가볍게 만든게 임금이 한 일이다.

좋은 뜻으로 한 일이지만 정작 상인들은 그 돈을 사용하길 꺼렸다. 생소함이 주된 이유겠지만 , 어쨋든 상인들이 돈을 쓰지 않으면 경제가 마비된다. 

손숙오가 하는 일은 불편하더라도 예전처럼 무거운 돈을 쓰도록 하는 일 이었다. 

손숙오가 한 말중에 지금도 유효한 말이 있다. 

"법령을 자주 바꾸면 백성들은 어느것을 따라야 할지 해ㅔㅅ깔리기 때문에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임금이 폼종 잡아보겠다고 뭘 좀 해 놓으면 매번 "헷갈리게 하지말고 그냥 계십시요.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것입니다."하니 임금 한테서 썩 예쁨 받는 스타일은 아니었을성 싶다. 

그래서 세번이나 재상이 되었지만, 또한 세번이나 재상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사기> 역시도 손숙오는 벼슬에 나간다고 기뻐하지도 않았고, 벼슬자리에서 쫓겨난다고 슬퍼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미묘하게 다르다. 

<사기>는 손숙오가 재상이 되고도 기뻐하지 않은 것은 , 본인의 잘난 능력에 재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고, 재상자리에서 물러나고도 슬퍼하지 않은 것은 , 어짜피 본인 잘못때문에 쫓겨나는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저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다. 


'나처럼 잘난 놈은 재상 안시키면 네 손해지 뭐, 흥!'하고는 돌아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장자>의 설명과 일치하는 구석이 있긴 하다. 

좋고 나쁘고는 벼슬이 아니라 자신이 결정한다는 점이다. 


아마 손숙오가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옛날을 회고하게 된다면 , <장자>에 나오는 대화처럼 한결 여유를 갖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벼슬 , 그거 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거지, 하게되면 열심히 일 하니까 좋은거고, 안하념 안 하는대로 편하니까 좋은거고, 내가 열심히 일 하니까 좋은거지 높은 벼슬한다고 좋은게 아니야, 내가 벼슬해서 좋은게 아니라 일해서 좋은 거먄 알면, 벼슬 같은건 안 해도 아무 상관없어."


"뜻을 얻었다는 것은 벼슬자리를 갖고 말 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벼슬자리는 와서 붙어도 막을 수 없고, 붙었다 떠나도 붙을 수 없다. 영화를 누린다고 교만하지 않고, 가난으로 고생한다고 빌 붙지 않으면 , 영화로우나 가난하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벼슬을 쟁취의 대상으로 , 성공의 척도로 삼으면 삶이 불행해 진다. 

벼슬은 내게 잠시 맡겨진 역할일 뿐이다. 그 역할에 충실 했으면 그뿐, 떠난다고 미련 가질 필요없다. 안 하면 또 어떤가, 벼슬 말고도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은 충분히 많은데.


같은 이야기를 애픽테토스는 연극배우에 빗대어 말한다. 

" 기억하라. 너는 연극배우다. 네 역할은 작가가 마음대로 결정한다. 짧으면 짧은대로, 길면 긴대로, 역할이 주어진다면, 너는 가난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절름발이가 될 수도 있고, 통치자가 될 수도 있고, 그냥 보통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냥 자연스럽게 연기하면 그만이다. 네게 주어진 역할을 잘 연기하는 것, 그게 네 일이니까.

네가 맡을 역할을 정하는것, 그건 네 일이 아니다. "


인생을 배우에 비유하는 건 애픽테토스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아니다.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에게서 직접 배운 , 그러니까 애픽테토스에게는 학문적으로는 고조할아버지쯤 되는 아리스톤이 진즉이 이런말을 했다.


"현명한 사람은 뛰어난 배우와 같다. 테르시테스의 역할을 맡으면 테르시테스가, 아가멤논의 역할을 맡으면 아가멤논이 된다." 

아가멤논은 트로이에 침략한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이다. 테르시테스는 일반병사다. 

아가멤논의 바보같은 지휘를 받지 않겠다며 말을 듣지않고 소요를 일으키다 오디세우스에게 망신을 당하고 혼나고 나서 눈물이나 쩔쩔짜는 역할이다. 

개인적으로는 정을 주고싶은 캐릭터인데 , 대개는, 특히 옛사람들의 글에서는 비열한 인물의 대표격으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아리스톤의 말은 , 가장 고귀한 역할이 주어지면 주어지는 대로, 가장 비열한 역할이 주아지면 그 또한 주어지느 ㄴ대로 충실히 소화하는 게 현명한 사람의 길이라는 것이다. 


핵심은 역시 배역은 "주어지는"것 이라는 점이다. 

배우가 직접 배역을 선택하지 않는다. 감독이 결정한다. 배역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뛰어난 배우는 마음에 들지 않는 배역이라도 온몸을 던져 연기한다. 

그리고 관객의 공감을 얻어낸다. 


인생을 연극배우에 비교할 때 잊어서는 안될 점이 있다. 

연극배우는 무대의상을 벗고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순간 더 이상 무대위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는 주인공 ㅇ;었지만 생활에서는 집에서 쫓겨난 바람둥이일수도 있고, 무데에서는 단역이라도 현실에서는 당당한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무데의상과 무대 분장을 지운, 알몸에 민낮의 우리 자신을 직시해야한다. 


손숙오에게는 재상역할이 주어졌다. 아주 잘 수행 했지만, 무대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어짜피 평생 무대위에서만 살 수는 없는 것이니까. 

어짜피 내려갈 것이라면 조금 더 일찍 내려가는 것도 괜찮다. 그러다 다시 등장 순서가 되면 또 무대에 오르면 그만이다./ 

그리고 자신의 순서가 모두 끝나면 조용히 의상을 벗고, 분장을 지우고, 자연인으로 돌아가면 된다. 


사극촬영장에는 가끔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진다고 한다. 

왕은 쉬는 시간에도 왕 노릇하고, 내시는 쉬는 시간에도 내시 노릇하고, 장군은 쉬는 시간에도 장군 노릇하고, 병졸은 쉬는 시간에도 병졸노릇 한다는 것이다. 

극에 몰입하다보면 그게 무척 자연스럽다고 한다. 

시는 시간에야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뿐 어짜피 의상은 그대로 입고 있으니 분위기가 그렇게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지 주어진 역할일 뿐인 지위에 흠뻑 빠져서 집에서도 역할 놀이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부인이 부하직원인 것처럼 명령을 내리고, 자식들 에게도 지시를 내린다. 

화장실에 가서 힘주면서도 고관대작 노릇을 하려고 든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간과 창자까지 고관대작이 된 줄 아는 꼴이다. 



나는 누구인가 잘 생각해 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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